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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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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시로 향하던 여객기가 착륙 중 갑작스러운 사고가 났습니다. 이로 인해 현재 사망자수가 136명을 넘어섰으며 생존자는 3명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보세요.”
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겠구나. 너무 놀라서 말이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
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
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
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팔에 꽂혀 있던 주사 바늘을 빼냈다. 그리고는 통증을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환자분,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다리 부상이 심각하니 안정을 취해야 해요.”
마침 병실로 들어오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목발 좀 가져다주세요. 퇴원해야겠어요.”
하연의 말투가 얼마나 단호했던지 간호사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장기간 입원해야 한다면 병원보다는 서준의 본가에서 요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사실, 하연은 HT그룹 회장의 비서였다.
이번 두바이 출장은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전시회의 제품 배치와 근무인원을 확정 짓기 위해 HT그룹을 대표해 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의 결과를 즉시 보고하기로 되어있었다.
‘한서준 이 남자, 도대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결국, 간호사는 퇴원하겠다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하연은 곧장 중환자실을 나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수납처로 향했다.
그때, 병원 1층 로비의 유리 벽 너머로 익숙한 차량번호판이 보였다. 고급 승용차 몇 대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HT 그룹 소유의 차들이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검정색 수트를 입은 한 남자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어떤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녀를 몹시 아끼는 듯 보였다. 그의 검정색 코트가 그녀의 하얀 다리를 덮고 있었다.
남자는 하연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황급히 병원 본관 쪽으로 향했다.
하연은 그 자리에 서서 여자를 안고 전문의 진찰실로 들어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혼생활 3년 동안 저렇게 다정한 남편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안고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갑자기 가슴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간호사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통화하며 그녀의 곁을 자나갔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저 사람이 경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HT 그룹 후계자 한서준이야. 실제로 보니 더 남자다운데? 우리 병원에서 보게 되다니 너무 신기해. 여자친구 데리고 산부인과에 진료받으러 왔나 봐.”
“산부인과? 확실해?”
“그럼 확실하지. 진료 차트에 적힌 걸 봤는데 벌써 태아가 12주나 됐던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한지 오늘 출혈이 있었대. 그래서 한사장이 안고 온 거라 던데?”
그 말을 들은 하연이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12주라면…… 두 달 전?’
제2화 하늘이 맺어준 커플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
‘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
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
“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
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
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ST 그룹이라…….’
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의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
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
“할머니, 전 괜찮아요.”
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
“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영숙은 그녀가 괴로운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에게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에 가시가 되어 박힐 줄은 몰랐다.
‘내가 지금까지 참고 견뎌온 날이 한순간에 우스워지다니…….’
……
서준은 다음날 밤 늦게나 되어 본가에 도착했다.
“아직 안 잤어? 깨어 있으면서 불은 왜 꺼 뒀어?”
그가 침실의 불을 켰다.
하연은 그런 그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집사가 가져다준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고 결국 그것들은 차갑게 식어버린 상태였다.
“당신 며칠 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그녀는 서준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수척해진 모습으로 돌아서서 힘없이 물었다.
재킷을 벗자 그의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서준은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침대 헤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결혼 3년 동안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행방을 추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T시에 있는 지사에 문제가 있어서 출장 다녀왔어.”
서준은 평소처럼 냉담하게 대답한 후, 귀찮다는 듯 거칠게 넥타이를 끌어내리고는 욕실 쪽으로 향했다.
“그래요?”
하연의 웃음 소리가 침실 안에 울렸다.
“비서실 구동후 실장님께 여쭤봤는데 T시로 가는 비행기표 구매내역이 없더군요.”
그녀의 말투에 의심이 잔뜩 묻어났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서준이 욕실 입구에 멈춰 서서 물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 곧 불 같이 화를 내겠네.’
제3화 한씨 집안 며느리가 된 이유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
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리며 침대에 기대 앉았다.
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
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 뱉었다.
순간,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하는 말 한 마디 없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하연은 며느리가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
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
“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혜경이는 내 세컨드가 아니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구나.’
하연은 자신을 잡고 있는 서준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혜경이가 5년 전에 출국한 이후로 서로 한번도 연락한 적 없어.”
그녀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어쩐지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를 만난 흔적이 1도 없더라니…….’
하지만 그 여자가 임신한 것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거예요?”
한서준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어두워진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왜 당신을 이 곳 안주인으로 들였는지 벌써 잊은 것 같군.”
HT 그룹 내에는 상속을 원하는 형제들이 많았고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자들도 많았다.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는 일부러 B시의 미혼 여성 중에서 손자며느리를 골라 그와 결혼시키고, 아들 딸을 낳아 그룹 내에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려고 했다.
강영숙 여사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하연을 손자며느리로 추천했다.
그녀는 서준을 찾아가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비밀결혼에 동의했다. 그리고 당시에 자신이 운영하던 잘 나가던 브랜드 샵도 문을 닫았다. 그 후로 HT그룹에 들어가 서준의 일을 돕는 비서로 일해왔다.
그래서 그가 하연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잊긴요, 하나를 손에 넣으면 더 갖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잖아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동자는 빛이 나고 있었다. 얼굴에 미소마저 없었더라면 마치 무덤에서 걸어 나온 처녀귀신 같아 보였을지도 몰랐다.
순간, 서준은 하연이 어딘가 변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잡힌 손을 슬며시 빼냈다.
꽤 큰 침실은 창문이 닫혀 있었는데 공기가 점점 답답해지고 있었다.
온도도 점점 높아져 어느덧 온도계가 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운 공기에 서준의 숨이 가빠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연은 다시 그의 셔츠 깃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지만 너무 더워 그녀를 밀어낼 기력이 없어 보였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제4화 더 이상 한씨 집안 며느리가 아니에요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에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
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
“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
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
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서준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이 모든 게 최음제 때문이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서준은 혀 끝을 깨물어 가까스로 되찾은 일말의 이성으로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
“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
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폭삭 가라앉아 버렸다.
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인 듯 한 마디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
“그래!”
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
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
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에는 원망이 차올랐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
……
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
“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짐 끌고 어딜 가려는 거예요? 혹시 여행 가요?”
한서준의 친동생 한서영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현재 B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다.
서영은 하연과 이렇게 가족으로 만나는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기만 했다.
“나가기 전에 나 머리 하는 거 좀 도와주고 가요.”
하연은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 서영의 머리를 곧잘 손질해주었다. 스타일이 좋아서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오늘 하연은 그녀의 말에 전혀 대꾸도 하지 않고 짐을 끌고 내려왔다. 마침 귀부인처럼 치장한 한씨 집안의 안주인 이수애 여사와 마주쳤다.
그녀는 HT그룹 한태규 회장의 두번째 아내이자 서준의 친어머니였다.
이수애는 처음부터 하연의 옷차림과 가정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함부로 말하기 일쑤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여행가방을 끌고 다니며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내려놓고 청소중인 이모님이나 도와라. 곧 새로 사람이 들어와서 지내게 될 거니까.”
하연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한서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새로? 누가요?”
“니가 좋아 죽는 혜경이 말고 누가 더 있겠니?”
“네? 혜경언니 귀국했어요?”
“돌아오기만 한 게 아니고, 네 오빠 아이를 가졌잖아. 우리집 터가 좋아서 잠깐 자기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몸을 추스를 거야.”
그녀는 이야기하면서 하연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민혜경이야 말로 자신이 생각해온 이상적인 며느릿감이었다. 애초에 그 일이 아니었으면 서준은 혜경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녀가 하연을 내려다보면서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너 아직도 거기 서서 멍하니 뭐하고 있니? 청소하러 가지 않고?”
예전 같았으면 하연은 틀림없이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을 멸시하는 그녀의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연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고 말했다.
“오늘부터 저와 서준 씨는 더 이상 부부사이가 아니에요. 서영이 머리 하는 거나 방 청소 같은 허드렛일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시키세요.”
제5화 이혼합의서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
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
“너!”
“엄마, 엄마!”
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
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
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
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너, 니가 감히!”
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
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
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시던가요.”
그녀는 한마디 내뱉고 서준의 본가를 나왔다. 이 여사가 화가 나서 길길이 뛰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연이 나가자 마자 이 여사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딸 한서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2층 올라가서 우리집에 돈 될만한 물건이 없어졌는지 잘 살펴봐. 들고 나가던 캐리어가 꽤나 무거워 보이던데 혹시 챙겨갔는지 모르잖아!”
잠시 후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한서영의 손에 서류가 하나 들려 있었다.
“엄마, 없어진 건 없어요. 대신 침대 머리맡에 뭐가 하나 있어요!”
서류를 빼앗아 살펴보던 이 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혼합의서]
이 여사는 곧장 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하연의 행각을 그에게 다 쏟아냈다.
펄펄 뛰는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 중 ‘이혼합의서’, ‘발기부전’ 등을 들은 서준은 의자에 걸어 둔 외투를 걸치고 즉시 회의실을 나섰다.
"엄마, 엄마! 일단 진정 좀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진정시켰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 귀한 아들에게 이 따위 말들을 써 놨는데? 마침 혜경이가 들어올 거니까 이 타이밍에 집 나가준 건 참 고맙지만. 아니, 지가 뭐라고 감히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 몽둥이 찜질로 쫓아내도 시원찮을 년……]
어머니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여태껏 순종적이고 눈치 빠르게 행동했던 하연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 평소와는 달랐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는 휴대폰 연락처 목록에서 하연의 번호를 검색했다.
그가 먼저 전화를 거는 것은 3년만에 처음이었다.
통화연결음이 들리는 순간, 비서실 구동후 실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방금 제 이메일로 서류가 하나 도착했는데, 최하연 비서의 사직서입니다.”
구실장은 너무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동안 최비서가 진행하던 사업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 제일 중요한 프로젝트가 두바이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인데 최비서가 아직 후임자에게 업무 인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실 건지…….”
서준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때 휴대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 최하연. 지금 내 전화 씹는다 이거지?
제6화 한서준을 찾아가다
공항 로비에 서 있던 최하연은 잠잠해진 핸드폰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한씨 가문에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가벼웠다.
오가는 여행객들을 보던 하연은 생각에 잠겼다.
‘B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하네.’
‘그래도 괜찮아,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단순히 한서준의 사랑이 식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떠나주는 게 더 나아.’
하연은 곧장 공항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고, 이미 D국행 티켓을 예매한 상태였다.
처음 그녀는 가족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B시에 머물렀다.
이번에 D국에서 열린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그녀와 서준을 만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이 프로젝트를 HT그룹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준은 감사해하기는커녕 그녀 혼자 보냈다.
이제 하연 차례였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이 티켓은 현재 잠겨 있어 당분간 처리할 수 없습니다.”
비즈니스 카운터 직원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잠겨있다고요?”
믿을 수 없던 하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회사 계좌로 예매하셨나요? 방금 환불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
하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서준의 비서였기에 회사에서 만들어준 대부분의 계좌는 HT그룹이 관리했다.
그리고 신분증은…….
얼마전 회사 인사부에서 어떤 것을 등록해야 한다며 들고 간 상태였다.
하연은 너무 긴장해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상처밖에 남지 않은 이 도시를 하루 빨리 떠나고 싶어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죄송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그녀는 가장자리로 걸어가 휴대폰을 꺼내 HT그룹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떴다.
하연은 머리속이 새하얘졌다.
‘어떻게 내 휴대폰 번호도 HT그룹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한다는 걸 잊고 있었을까!’
‘HT그룹, HT그룹!’
HT그룹은 계속해서 그녀의 걸림돌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하연은 황급히 택시를 잡고 HT그룹 빌딩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비가 한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고, 곧 우뚝 솟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돈을 건넨 뒤 캐리어를 끌고 HT그룹 본관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의 퇴사 소식은 아직 퍼지지 않았고, 하연은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는 인사팀이 있는 12층을 눌렸다.
“아이고, 최 비서님, 오늘 비 온다고 했는데 모르셨나 봐요.”
인사팀 차장은 여성스러운 손짓을 즐겨 하는 기생오라비이자, 아부에 능한 제이슨이었다.
서준이 하연에게 잘해주지 않는 것을 본 그는 평소 하연을 막대하는 데에 익숙했다.
“내 신분증은 어디있어요?”
하연은 그와 대화할 생각이 없었기에 바로 요점부터 말했다.
“신분증이요? 그럼 잘못 찾아오셨네요. 2분 전에 대표 비서실 구 실장님이 가져가셨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하연은 이 결과를 예상했어야 했다.
서준은 비즈니스를 할 때 엄격하고 신속하게 움직이고 한번 한 말은 바꾸지 않는 B시에서 알아주는 냉혈한이었다.
어떻게 하연이 쉽게 그에게 도전할 수 있겠는가!
하연이 캐리어를 끌고 돌아서서 서준에게 가려고 하는데 제이슨이 그녀를 잡았다.
그의 태도가 도발적인지, 악의가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해고될 수도 있어요, 잘 생각해요. 지금 위층에서는 꽤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있고, 한 대표님께는 이미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어요.”
제7화 민혜경의 부탁
한서준의 약혼자?
최하연과 한서준은 비밀 결혼을 했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서준의 비서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럼 민혜경을 가리키는 건가?’
하연의 이혼협의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혜경은 HT그룹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나중에 그녀는 한때 하연이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서준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할 것이다.
이 생각에 하연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인사팀 사무실을 나갔다.
제이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이고, 최 비서님이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다 알 수 있는데, 해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그는 컴퓨터를 보며 말했다.
“아,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네.”
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구동후를 만났다.
“최 비서님, 오셨네요.”
그녀의 캐리어를 본 동후는 틀림없이 하연이 신분증을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신분증이 있는 회의실을 가리켰다.
“비서님 신분증은 대표님께 드렸어요. 아직 회의 중이신데, 아직 세 번째 회의예요. 급하시면 제가 말씀드릴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하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갖다 드릴까요?”
동후는 서준이 그녀를 해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연은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많아 그녀를 해고하면 당장 적당한 직원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K국식 핸드드립 커피예요, 배운지 얼마 안 됐지만요.”
“전 정말 괜찮아요.”
서준과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던 하연은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가 서준에게 서류를 건넸다.
하연은 대표실 앞을 지나가다 회의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
문틈사이로 보인 회의실 내부에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서준의 뒷모습과 정장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넓은 그의 어깨를 봤다.
그는 양쪽에 있는 사람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고, 조금씩 보이는 서준의 얼굴은 차가웠으며 한 번씩 입술이 움직였다.
서준은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하연은 자신의 손에 들린 캐리어와 비에 흠뻑 젖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회의실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대표실을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유리였지만 어렴풋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여자는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혜경이 분명했다.
지금 들어가는 건 자신의 부끄러움을 더할 뿐이었다.
이런 생각에 하연은 짐을 잠시 보관한 후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준에게 어떻게 돌려달라고 할지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최 비서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손을 씻으러 온 인턴 비서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됐네.”
하연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인턴 비서가 떠난 후 휴지로 얼굴을 닦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난 번에 D국에서 큰오빠가 살이 빠졌다고 하길래 다이어트 한다고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거였어.’
‘그래,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야.’
그때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우아한 자태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고 투명했으며 살짝 불룩한 배를 제외하고는 온몸에서 고귀함과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혜경을 본 하연은 왠지 모르게 열등감이 생겼다.
그녀는 재빨리 남은 물기를 닦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잠시만요.”
그러나 옆에서 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사람들이 최 비서님이라고 부르던데, 서준 씨 비서 맞죠?”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하연의 몸은 그대로 굳어졌다.
혜경은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서준 씨 회의가 곧 끝날 것 같은데 커피 한 잔만 대표실로 가져다 주시겠어요? 현호 씨가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렇죠?”
제8화 저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을 대표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
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
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
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
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
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
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
‘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
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
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
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
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
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하연은 직감적으로 서준이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왜 왔는 지 알면서 나한테 굳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뭐야!’
“최 비서님?”
우쿠커니 서 있는 하연을 본 혜경이 입을 열었다.
“네.”
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후 도망치듯 돌아갔지만 단 두 걸음 만에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그녀의 머리속엔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의 모습뿐이었다.
하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나 혜경은 자신과 서준,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그녀의 존재가 거슬렸다.
“최 비서님, 또 다른 용건 있으세요?”
“그…….”
하연은 끝내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뒤를 돌아 말했다.
“저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을 대표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대표님, 돌려주세요.”
200제곱미터에 달하는 대표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흰 셔츠를 입고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서준은 소름 끼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물건이요?”
이 말을 들은 혜경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서준을 더 꽉 껴안으며 물었다.
“서준 씨, 왜 비서 물건을 숨기는 거야?”
“아, 별거 아니야.”
서준은 혜경의 얇은 팔을 잡아당겼고, 하연의 눈 앞에서 두 사람의 몸을 더 밀착시켰다.
하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피눈물이 나는 기분이었다.
남 보다 못한 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봐.”
그 말은 강렬하고도 가혹했다.
그런 서준의 모습은 그녀에게 신분증을 쉽게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신분증이에요.”
혜경이 있는 틈을 타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일을 해결하고 깔끔하게 떠나고 싶었을 뿐 잠시도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전 이미 HT그룹에서 퇴직했는데 대표님께서 왜 제 신분증을 가져 가셨는지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저에게 다른 감정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HT그룹에는 일 잘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잖아요. 저 같은 비서에게 그런 비열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9화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유니폼을 벗다
대표실은 살얼음장과 같았다.
늘 한서준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최하연이 강압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말에 서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정말이야, 서준 씨?”
혜경이 다가온 순간, 서준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겠어?”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여자 말대로 HT그룹에 일 잘 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어. 저런 일개 비서의 신분증은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아.”
“퇴사하기 전에 인수인계는 똑바로 해야지. 입사할 때 지급한 유니폼을 입고 인수인계도 없이 떠나는 건 HT그룹 규칙에 어긋나니까.”
그제야 하연은 자신의 신분증을 이용해 HT그룹으로 불러들인 서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곳에 남거나 아무것도 없이 떠나거나.
서준은 이런 방법을 사용해 그녀를 항복하도록 하려고 했으며 하연이 항복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 순간, 하연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존심까지 모조리 짓밟혔다.
“아, 그런 거야? 그런 거면 최 비서가 잘못했네.”
“순간 최 비서랑 서준 씨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았잖아.”
혜경이 서준의 품을 더 파고드는 것을 본 하연은 미친듯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검은색 유니폼 자켓을 벗고 셔츠를 하나씩 풀었다.
“벗을게요.”
간결하고 확실한 네 글자.
‘서준 씨 말이 맞아. 끝낼 거면 확실하게 끝내야지.’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표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혜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미 고개를 숙인 서준의 욕정으로 얼룩진 서늘한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는 최근 하연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이 느낌은 그녀가 자신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서준은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다.
아니면 3년이라는 결혼 생활동안 그녀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까?
대표실의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많은 직원들이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
아무도 항상 온화하고 친절했던 하연에게 그런 거친 면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셔츠를 벗은 하연은 하얀 나시만 입고 있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다.
그녀의 몸매가 드러나자 밖에 있던 동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벗을 줄은 몰랐어요, 근데 최 비서님 몸매 진짜 예쁘네요…….”
“아니, 우리 유니폼이 이렇게 펑퍼짐한데 누가 최 비서님 몸매가 저렇게 좋을지 알았겠어요?”
구동후의 뼈 때리는 말로 그들의 수다가 멈췄다.
“아주 한가하지? 일 안 해? 전부 월급에서 깎일 줄 알아!”
모여 있던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 즉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동후는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마음속에서 충돌했다.
‘대표님이 이미 퇴사한 일개 비서 때문에 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 건 처음 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표실 안에서 나시 하나만 입고 있던 하연은 갑작스러운 찬 공기에 움찔했다.
그녀는 추위를 견딘 후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 이제 제 신분증 좀 주실래요?”
하연은 그가 또 다른 이유를 대며 거절할까 봐 걱정하며 말했다.
“말씀하신 인수인계는 제가 자리를 잡은 후 구 실장님께 이메일로 보내겠습니다. 대표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난 달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이는 서준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뜻이었다.
서준의 검은 눈동자는 서늘해졌고, 확고한 하연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휘몰아치고 있었다.
제10화 오빠의 마중
“서준 씨?”
민혜경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저 최하연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
“서준 씨, 얼른 주고 보내! 오늘 우리 부모님이 내가 당신 데리고 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이 서준 씨 보고 싶대.”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한서준은 정신을 차렸다.
한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는 민씨 저택에 방문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말에도 하연의 얼굴은 서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
서준은 답답하고 복잡했다.
“저기 있어.”
하연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신분증이 정수기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마치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네.”
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분증을 주워들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대표실을 떠났다.
그 뒤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저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가십거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더군다나 회사에선 하연이 서준을 꼬셔서 그에게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녀는 법적으로 서준의 부인이었지만, 내연녀로 치부됐다.
하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최 비서님, 밖에 비 와요. 추우시면 제 겉옷 드릴게요.”
우산을 가져다준 사람은 다름아닌 구동후였다.
‘매정한 HT그룹에도 따뜻한 사람이 있긴 하구나.’
겉옷을 벗으려는 동후를 본 하연은 그를 말리며 씁쓸함을 목에 삼켰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구 실장님. 이제 만날 일도 없겠네요.”
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본 동후는 입을 움직였지만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럴 때는 폭풍우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앉아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던 하연은 몇 년 동안 살았던 도시가 눈에 들어와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지친 그녀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말했다.
“오빠…….”
그녀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8시간 후, 전용기가 B시 공항에 착륙했다.
하연은 키가 크고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의 품에 안겼다.
뒤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의 캐리어를 끌고 두 사람을 전용기에 태웠다.
……
늦은 밤,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천천히 한씨 고택으로 들어섰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서준은 고개를 들어 무성한 관목 아래 고층 저택을 바라봤다.
평소 늘 불이 켜져 있던 침실도 어둡기만 했다.
‘진짜 갔구나.’
혜경은 서늘한 서준의 기운을 느꼈고, 식사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한 말 때문에 화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서준 씨, 밥 먹을 때 우리 언니랑 서준 씨 사이에 일어난 일로 기분이 상했다는 거 알아. 결혼은 서두르지 않아도 돼, 우리 아빠는 신경 쓰지 마. 우리 아빠는 내가 혼전임신이라 재촉하는 것뿐이야…….”
혜경의 말에 서준은 생각을 뒤로 미뤄두고, 그녀가 잡은 자신의 소매 끝을 보며 말했다.
“구겨졌네.”
혜경은 그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
그 후 서준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고, 혜경은 쓸쓸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늘 대표실에서 자기 다리 위에 앉혔으면서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딴 사람이 된 거야?’
하지만 그녀는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서준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제11화 참가 자격이 박탈당하다
고택에서 한참을 기다린 가정부는 돌아온 한서준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서준의 뒤에 있는 민혜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혜경 아가씨, 방은 준비해 뒀습니다. 이쪽 복도를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
서준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던 혜경은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서준 씨,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고택으로 들어오는 걸 동의한 서준은 결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격이었다.
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혜경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남아있던 하연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그는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해라고 지시했었다.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먼저 자러 가.”
서준은 무관심한 어투로 혜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예상대로 혜경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추궁을 해 왔고, 서준의 지시를 받은 배현숙이 그녀를 막았다.
“혜경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
고택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차갑기 짝이 없는 서준의 얼굴이 가려졌다.
혜경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눌렀다.
‘귀국한 후로 서준 씨의 행동이 너무 달라졌어.’
가깝고도 먼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서재로 돌아온 서준은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은 뒤 손에 든 문서를 훑어봤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하연이 서재에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고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
때로는 서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소파에서, 서준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프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그녀의 흔적에 서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구 실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준은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대표님, 방금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HT그룹이 기부금액 적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서준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원래 이 모든 것은 하연이 담당했지만 그녀가 떠난 이상 모든 건 동후의 몫이 되었다.
“기부금액 적다고? 박람회 참가 자격은 각 그룹이 적십자사에 기부한 금액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거 아니야? HT그룹은 작년에 이미 600억 원을 기부했어, 근데 적다고?”
대표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동후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려고 최 비서님께 연락드렸지만,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고…….]
“…….”
동후는 다음 말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곧 서재는 정적에 휩싸였고 서준은 인상을 지으며 오늘 대표실에서 유니폼을 벗던 하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휘몰아쳤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하연은 시골에서 태어나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노력 끝에 옷가게를 열었지만 서준과 결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렇게 하연은 한씨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주는 용돈을 제외하고는 추가 수입이 없었다.
‘돈도 없는 여자가 어디로 갔을까?’
“우선 시골로 가 봐.”
그는 하연이 알려준 고향 주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전화해. 총책임자랑 얘기를 해 봐야 겠어.”
전화를 끊은 서준은 휴대폰을 집어 던졌고,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제12화 D국의 다섯 오빠들
유럽풍 건물의 호화로운 스위트룸, 최하연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방 구조나 가구들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다름없었다.
하연의 머리맡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는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
코 끝이 시큰거렸다.
B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우였다.
“할아버지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심정지가 오셨어,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셔.”
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풍기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났다.
그는 B시로 하연을 데리러 온 오빠 최하민이었다.
하민은 현재 최씨 가문의 경영을 이끌고 있고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나 울먹였다.
“오빠, 많이 위중하신 거야……?”
“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넌 네 몸이나 챙겨.”
하민은 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았다.
“지금 네 꼴을 봐, 이게 사람 얼굴이야? 예전에 한 약속 잊었어?”
이 말을 들은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서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아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영원히 최씨 가문에 남아 가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하연은 최씨 가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4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사람을 찾아 놓은 거야?’
‘나씨 가문의 아들은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근데 오빠 난 이혼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
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
순간 하민은 표정을 풀더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겁주려고 한 말이었다.
“넌 최씨 집안 딸이야. 우리 가문은 자식을 팔면서까지 집안을 키우진 않아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치하실 때까지는 내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똑똑히 해.”
이 말의 의미는 D국에 있는 하민의 DS그룹에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하연의 가족들은 그녀가 상운대 글로벌비지니스학부에 들어갈 때부터 이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디자이너 브랜드 숍을 열고 서준에게 첫눈에 반할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오빠랑 할아버지가 많이 속상해하실 거야.’
简介:结婚三年,黎歌连霍靳城的手指都没碰到,更别提诞下一儿半女。

直到一场空难,她作为幸存者,却在医院里撞见了霍靳城陪别的女人做产检。

她才知道,她从未走进过这个男人的心房。

决定放手的那一刻,她摇身一变竟然成了全球首富的外孙女。

既然霍太太做不了,那就做霍氏的死对头,让他再也高攀不上!

<…B시로 향하던 여객기가 착륙 중 갑작스러운 사고가 났습니다. 이로 인해 현재 사망자수가 136명을 넘어섰으며 생존자는 3명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보세요.”
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겠구나. 너무 놀라서 말이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
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
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
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팔에 꽂혀 있던 주사 바늘을 빼냈다. 그리고는 통증을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환자분,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다리 부상이 심각하니 안정을 취해야 해요.”
마침 병실로 들어오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목발 좀 가져다주세요. 퇴원해야겠어요.”
하연의 말투가 얼마나 단호했던지 간호사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장기간 입원해야 한다면 병원보다는 서준의 본가에서 요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사실, 하연은 HT그룹 회장의 비서였다.
이번 두바이 출장은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전시회의 제품 배치와 근무인원을 확정 짓기 위해 HT그룹을 대표해 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의 결과를 즉시 보고하기로 되어있었다.
‘한서준 이 남자, 도대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결국, 간호사는 퇴원하겠다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하연은 곧장 중환자실을 나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수납처로 향했다.
그때, 병원 1층 로비의 유리 벽 너머로 익숙한 차량번호판이 보였다. 고급 승용차 몇 대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HT 그룹 소유의 차들이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검정색 수트를 입은 한 남자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어떤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녀를 몹시 아끼는 듯 보였다. 그의 검정색 코트가 그녀의 하얀 다리를 덮고 있었다.
남자는 하연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황급히 병원 본관 쪽으로 향했다.
하연은 그 자리에 서서 여자를 안고 전문의 진찰실로 들어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혼생활 3년 동안 저렇게 다정한 남편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안고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갑자기 가슴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간호사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통화하며 그녀의 곁을 자나갔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저 사람이 경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HT 그룹 후계자 한서준이야. 실제로 보니 더 남자다운데? 우리 병원에서 보게 되다니 너무 신기해. 여자친구 데리고 산부인과에 진료받으러 왔나 봐.”
“산부인과? 확실해?”
“그럼 확실하지. 진료 차트에 적힌 걸 봤는데 벌써 태아가 12주나 됐던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한지 오늘 출혈이 있었대. 그래서 한사장이 안고 온 거라 던데?”
그 말을 들은 하연이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12주라면…… 두 달 전?’
제2화 하늘이 맺어준 커플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
‘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
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
“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
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
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ST 그룹이라…….’
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의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
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
“할머니, 전 괜찮아요.”
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
“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영숙은 그녀가 괴로운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에게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에 가시가 되어 박힐 줄은 몰랐다.
‘내가 지금까지 참고 견뎌온 날이 한순간에 우스워지다니…….’
……
서준은 다음날 밤 늦게나 되어 본가에 도착했다.
“아직 안 잤어? 깨어 있으면서 불은 왜 꺼 뒀어?”
그가 침실의 불을 켰다.
하연은 그런 그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집사가 가져다준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고 결국 그것들은 차갑게 식어버린 상태였다.
“당신 며칠 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그녀는 서준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수척해진 모습으로 돌아서서 힘없이 물었다.
재킷을 벗자 그의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서준은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침대 헤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결혼 3년 동안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행방을 추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T시에 있는 지사에 문제가 있어서 출장 다녀왔어.”
서준은 평소처럼 냉담하게 대답한 후, 귀찮다는 듯 거칠게 넥타이를 끌어내리고는 욕실 쪽으로 향했다.
“그래요?”
하연의 웃음 소리가 침실 안에 울렸다.
“비서실 구동후 실장님께 여쭤봤는데 T시로 가는 비행기표 구매내역이 없더군요.”
그녀의 말투에 의심이 잔뜩 묻어났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서준이 욕실 입구에 멈춰 서서 물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 곧 불 같이 화를 내겠네.’
제3화 한씨 집안 며느리가 된 이유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
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리며 침대에 기대 앉았다.
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
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 뱉었다.
순간,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하는 말 한 마디 없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하연은 며느리가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
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
“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혜경이는 내 세컨드가 아니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구나.’
하연은 자신을 잡고 있는 서준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혜경이가 5년 전에 출국한 이후로 서로 한번도 연락한 적 없어.”
그녀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어쩐지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를 만난 흔적이 1도 없더라니…….’
하지만 그 여자가 임신한 것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거예요?”
한서준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어두워진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왜 당신을 이 곳 안주인으로 들였는지 벌써 잊은 것 같군.”
HT 그룹 내에는 상속을 원하는 형제들이 많았고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자들도 많았다.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는 일부러 B시의 미혼 여성 중에서 손자며느리를 골라 그와 결혼시키고, 아들 딸을 낳아 그룹 내에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려고 했다.
강영숙 여사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하연을 손자며느리로 추천했다.
그녀는 서준을 찾아가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비밀결혼에 동의했다. 그리고 당시에 자신이 운영하던 잘 나가던 브랜드 샵도 문을 닫았다. 그 후로 HT그룹에 들어가 서준의 일을 돕는 비서로 일해왔다.
그래서 그가 하연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잊긴요, 하나를 손에 넣으면 더 갖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잖아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동자는 빛이 나고 있었다. 얼굴에 미소마저 없었더라면 마치 무덤에서 걸어 나온 처녀귀신 같아 보였을지도 몰랐다.
순간, 서준은 하연이 어딘가 변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잡힌 손을 슬며시 빼냈다.
꽤 큰 침실은 창문이 닫혀 있었는데 공기가 점점 답답해지고 있었다.
온도도 점점 높아져 어느덧 온도계가 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운 공기에 서준의 숨이 가빠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연은 다시 그의 셔츠 깃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지만 너무 더워 그녀를 밀어낼 기력이 없어 보였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제4화 더 이상 한씨 집안 며느리가 아니에요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에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
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
“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
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
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서준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이 모든 게 최음제 때문이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서준은 혀 끝을 깨물어 가까스로 되찾은 일말의 이성으로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
“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
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폭삭 가라앉아 버렸다.
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인 듯 한 마디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
“그래!”
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
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
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에는 원망이 차올랐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
……
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
“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짐 끌고 어딜 가려는 거예요? 혹시 여행 가요?”
한서준의 친동생 한서영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현재 B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다.
서영은 하연과 이렇게 가족으로 만나는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기만 했다.
“나가기 전에 나 머리 하는 거 좀 도와주고 가요.”
하연은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 서영의 머리를 곧잘 손질해주었다. 스타일이 좋아서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오늘 하연은 그녀의 말에 전혀 대꾸도 하지 않고 짐을 끌고 내려왔다. 마침 귀부인처럼 치장한 한씨 집안의 안주인 이수애 여사와 마주쳤다.
그녀는 HT그룹 한태규 회장의 두번째 아내이자 서준의 친어머니였다.
이수애는 처음부터 하연의 옷차림과 가정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함부로 말하기 일쑤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여행가방을 끌고 다니며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내려놓고 청소중인 이모님이나 도와라. 곧 새로 사람이 들어와서 지내게 될 거니까.”
하연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한서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새로? 누가요?”
“니가 좋아 죽는 혜경이 말고 누가 더 있겠니?”
“네? 혜경언니 귀국했어요?”
“돌아오기만 한 게 아니고, 네 오빠 아이를 가졌잖아. 우리집 터가 좋아서 잠깐 자기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몸을 추스를 거야.”
그녀는 이야기하면서 하연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민혜경이야 말로 자신이 생각해온 이상적인 며느릿감이었다. 애초에 그 일이 아니었으면 서준은 혜경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녀가 하연을 내려다보면서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너 아직도 거기 서서 멍하니 뭐하고 있니? 청소하러 가지 않고?”
예전 같았으면 하연은 틀림없이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을 멸시하는 그녀의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연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고 말했다.
“오늘부터 저와 서준 씨는 더 이상 부부사이가 아니에요. 서영이 머리 하는 거나 방 청소 같은 허드렛일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시키세요.”
제5화 이혼합의서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
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
“너!”
“엄마, 엄마!”
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
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
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
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너, 니가 감히!”
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
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
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시던가요.”
그녀는 한마디 내뱉고 서준의 본가를 나왔다. 이 여사가 화가 나서 길길이 뛰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연이 나가자 마자 이 여사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딸 한서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2층 올라가서 우리집에 돈 될만한 물건이 없어졌는지 잘 살펴봐. 들고 나가던 캐리어가 꽤나 무거워 보이던데 혹시 챙겨갔는지 모르잖아!”
잠시 후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한서영의 손에 서류가 하나 들려 있었다.
“엄마, 없어진 건 없어요. 대신 침대 머리맡에 뭐가 하나 있어요!”
서류를 빼앗아 살펴보던 이 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혼합의서]
이 여사는 곧장 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하연의 행각을 그에게 다 쏟아냈다.
펄펄 뛰는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 중 ‘이혼합의서’, ‘발기부전’ 등을 들은 서준은 의자에 걸어 둔 외투를 걸치고 즉시 회의실을 나섰다.
"엄마, 엄마! 일단 진정 좀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진정시켰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 귀한 아들에게 이 따위 말들을 써 놨는데? 마침 혜경이가 들어올 거니까 이 타이밍에 집 나가준 건 참 고맙지만. 아니, 지가 뭐라고 감히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 몽둥이 찜질로 쫓아내도 시원찮을 년……]
어머니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여태껏 순종적이고 눈치 빠르게 행동했던 하연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 평소와는 달랐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는 휴대폰 연락처 목록에서 하연의 번호를 검색했다.
그가 먼저 전화를 거는 것은 3년만에 처음이었다.
통화연결음이 들리는 순간, 비서실 구동후 실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방금 제 이메일로 서류가 하나 도착했는데, 최하연 비서의 사직서입니다.”
구실장은 너무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동안 최비서가 진행하던 사업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 제일 중요한 프로젝트가 두바이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인데 최비서가 아직 후임자에게 업무 인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실 건지…….”
서준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때 휴대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 최하연. 지금 내 전화 씹는다 이거지?
제6화 한서준을 찾아가다
공항 로비에 서 있던 최하연은 잠잠해진 핸드폰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한씨 가문에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가벼웠다.
오가는 여행객들을 보던 하연은 생각에 잠겼다.
‘B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하네.’
‘그래도 괜찮아,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단순히 한서준의 사랑이 식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떠나주는 게 더 나아.’
하연은 곧장 공항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고, 이미 D국행 티켓을 예매한 상태였다.
처음 그녀는 가족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B시에 머물렀다.
이번에 D국에서 열린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그녀와 서준을 만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이 프로젝트를 HT그룹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준은 감사해하기는커녕 그녀 혼자 보냈다.
이제 하연 차례였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이 티켓은 현재 잠겨 있어 당분간 처리할 수 없습니다.”
비즈니스 카운터 직원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잠겨있다고요?”
믿을 수 없던 하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회사 계좌로 예매하셨나요? 방금 환불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
하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서준의 비서였기에 회사에서 만들어준 대부분의 계좌는 HT그룹이 관리했다.
그리고 신분증은…….
얼마전 회사 인사부에서 어떤 것을 등록해야 한다며 들고 간 상태였다.
하연은 너무 긴장해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상처밖에 남지 않은 이 도시를 하루 빨리 떠나고 싶어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죄송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그녀는 가장자리로 걸어가 휴대폰을 꺼내 HT그룹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떴다.
하연은 머리속이 새하얘졌다.
‘어떻게 내 휴대폰 번호도 HT그룹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한다는 걸 잊고 있었을까!’
‘HT그룹, HT그룹!’
HT그룹은 계속해서 그녀의 걸림돌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하연은 황급히 택시를 잡고 HT그룹 빌딩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비가 한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고, 곧 우뚝 솟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돈을 건넨 뒤 캐리어를 끌고 HT그룹 본관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의 퇴사 소식은 아직 퍼지지 않았고, 하연은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는 인사팀이 있는 12층을 눌렸다.
“아이고, 최 비서님, 오늘 비 온다고 했는데 모르셨나 봐요.”
인사팀 차장은 여성스러운 손짓을 즐겨 하는 기생오라비이자, 아부에 능한 제이슨이었다.
서준이 하연에게 잘해주지 않는 것을 본 그는 평소 하연을 막대하는 데에 익숙했다.
“내 신분증은 어디있어요?”
하연은 그와 대화할 생각이 없었기에 바로 요점부터 말했다.
“신분증이요? 그럼 잘못 찾아오셨네요. 2분 전에 대표 비서실 구 실장님이 가져가셨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하연은 이 결과를 예상했어야 했다.
서준은 비즈니스를 할 때 엄격하고 신속하게 움직이고 한번 한 말은 바꾸지 않는 B시에서 알아주는 냉혈한이었다.
어떻게 하연이 쉽게 그에게 도전할 수 있겠는가!
하연이 캐리어를 끌고 돌아서서 서준에게 가려고 하는데 제이슨이 그녀를 잡았다.
그의 태도가 도발적인지, 악의가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해고될 수도 있어요, 잘 생각해요. 지금 위층에서는 꽤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있고, 한 대표님께는 이미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어요.”
제7화 민혜경의 부탁
한서준의 약혼자?
최하연과 한서준은 비밀 결혼을 했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서준의 비서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럼 민혜경을 가리키는 건가?’
하연의 이혼협의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혜경은 HT그룹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나중에 그녀는 한때 하연이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서준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할 것이다.
이 생각에 하연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인사팀 사무실을 나갔다.
제이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이고, 최 비서님이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다 알 수 있는데, 해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그는 컴퓨터를 보며 말했다.
“아,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네.”
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구동후를 만났다.
“최 비서님, 오셨네요.”
그녀의 캐리어를 본 동후는 틀림없이 하연이 신분증을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신분증이 있는 회의실을 가리켰다.
“비서님 신분증은 대표님께 드렸어요. 아직 회의 중이신데, 아직 세 번째 회의예요. 급하시면 제가 말씀드릴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하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갖다 드릴까요?”
동후는 서준이 그녀를 해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연은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많아 그녀를 해고하면 당장 적당한 직원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K국식 핸드드립 커피예요, 배운지 얼마 안 됐지만요.”
“전 정말 괜찮아요.”
서준과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던 하연은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가 서준에게 서류를 건넸다.
하연은 대표실 앞을 지나가다 회의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
문틈사이로 보인 회의실 내부에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서준의 뒷모습과 정장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넓은 그의 어깨를 봤다.
그는 양쪽에 있는 사람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고, 조금씩 보이는 서준의 얼굴은 차가웠으며 한 번씩 입술이 움직였다.
서준은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하연은 자신의 손에 들린 캐리어와 비에 흠뻑 젖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회의실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대표실을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유리였지만 어렴풋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여자는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혜경이 분명했다.
지금 들어가는 건 자신의 부끄러움을 더할 뿐이었다.
이런 생각에 하연은 짐을 잠시 보관한 후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준에게 어떻게 돌려달라고 할지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최 비서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손을 씻으러 온 인턴 비서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됐네.”
하연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인턴 비서가 떠난 후 휴지로 얼굴을 닦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난 번에 D국에서 큰오빠가 살이 빠졌다고 하길래 다이어트 한다고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거였어.’
‘그래,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야.’
그때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우아한 자태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고 투명했으며 살짝 불룩한 배를 제외하고는 온몸에서 고귀함과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혜경을 본 하연은 왠지 모르게 열등감이 생겼다.
그녀는 재빨리 남은 물기를 닦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잠시만요.”
그러나 옆에서 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사람들이 최 비서님이라고 부르던데, 서준 씨 비서 맞죠?”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하연의 몸은 그대로 굳어졌다.
혜경은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서준 씨 회의가 곧 끝날 것 같은데 커피 한 잔만 대표실로 가져다 주시겠어요? 현호 씨가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렇죠?”
제8화 저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을 대표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
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
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
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
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
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
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
‘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
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
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
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
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
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하연은 직감적으로 서준이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왜 왔는 지 알면서 나한테 굳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뭐야!’
“최 비서님?”
우쿠커니 서 있는 하연을 본 혜경이 입을 열었다.
“네.”
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후 도망치듯 돌아갔지만 단 두 걸음 만에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그녀의 머리속엔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의 모습뿐이었다.
하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나 혜경은 자신과 서준,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그녀의 존재가 거슬렸다.
“최 비서님, 또 다른 용건 있으세요?”
“그…….”
하연은 끝내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뒤를 돌아 말했다.
“저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을 대표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대표님, 돌려주세요.”
200제곱미터에 달하는 대표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흰 셔츠를 입고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서준은 소름 끼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물건이요?”
이 말을 들은 혜경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서준을 더 꽉 껴안으며 물었다.
“서준 씨, 왜 비서 물건을 숨기는 거야?”
“아, 별거 아니야.”
서준은 혜경의 얇은 팔을 잡아당겼고, 하연의 눈 앞에서 두 사람의 몸을 더 밀착시켰다.
하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피눈물이 나는 기분이었다.
남 보다 못한 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봐.”
그 말은 강렬하고도 가혹했다.
그런 서준의 모습은 그녀에게 신분증을 쉽게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신분증이에요.”
혜경이 있는 틈을 타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일을 해결하고 깔끔하게 떠나고 싶었을 뿐 잠시도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전 이미 HT그룹에서 퇴직했는데 대표님께서 왜 제 신분증을 가져 가셨는지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저에게 다른 감정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HT그룹에는 일 잘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잖아요. 저 같은 비서에게 그런 비열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9화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유니폼을 벗다
대표실은 살얼음장과 같았다.
늘 한서준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최하연이 강압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말에 서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정말이야, 서준 씨?”
혜경이 다가온 순간, 서준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겠어?”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여자 말대로 HT그룹에 일 잘 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어. 저런 일개 비서의 신분증은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아.”
“퇴사하기 전에 인수인계는 똑바로 해야지. 입사할 때 지급한 유니폼을 입고 인수인계도 없이 떠나는 건 HT그룹 규칙에 어긋나니까.”
그제야 하연은 자신의 신분증을 이용해 HT그룹으로 불러들인 서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곳에 남거나 아무것도 없이 떠나거나.
서준은 이런 방법을 사용해 그녀를 항복하도록 하려고 했으며 하연이 항복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 순간, 하연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존심까지 모조리 짓밟혔다.
“아, 그런 거야? 그런 거면 최 비서가 잘못했네.”
“순간 최 비서랑 서준 씨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았잖아.”
혜경이 서준의 품을 더 파고드는 것을 본 하연은 미친듯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검은색 유니폼 자켓을 벗고 셔츠를 하나씩 풀었다.
“벗을게요.”
간결하고 확실한 네 글자.
‘서준 씨 말이 맞아. 끝낼 거면 확실하게 끝내야지.’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표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혜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미 고개를 숙인 서준의 욕정으로 얼룩진 서늘한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는 최근 하연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이 느낌은 그녀가 자신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서준은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다.
아니면 3년이라는 결혼 생활동안 그녀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까?
대표실의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많은 직원들이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
아무도 항상 온화하고 친절했던 하연에게 그런 거친 면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셔츠를 벗은 하연은 하얀 나시만 입고 있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다.
그녀의 몸매가 드러나자 밖에 있던 동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벗을 줄은 몰랐어요, 근데 최 비서님 몸매 진짜 예쁘네요…….”
“아니, 우리 유니폼이 이렇게 펑퍼짐한데 누가 최 비서님 몸매가 저렇게 좋을지 알았겠어요?”
구동후의 뼈 때리는 말로 그들의 수다가 멈췄다.
“아주 한가하지? 일 안 해? 전부 월급에서 깎일 줄 알아!”
모여 있던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 즉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동후는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마음속에서 충돌했다.
‘대표님이 이미 퇴사한 일개 비서 때문에 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 건 처음 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표실 안에서 나시 하나만 입고 있던 하연은 갑작스러운 찬 공기에 움찔했다.
그녀는 추위를 견딘 후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 이제 제 신분증 좀 주실래요?”
하연은 그가 또 다른 이유를 대며 거절할까 봐 걱정하며 말했다.
“말씀하신 인수인계는 제가 자리를 잡은 후 구 실장님께 이메일로 보내겠습니다. 대표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난 달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이는 서준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뜻이었다.
서준의 검은 눈동자는 서늘해졌고, 확고한 하연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휘몰아치고 있었다.
제10화 오빠의 마중
“서준 씨?”
민혜경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저 최하연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
“서준 씨, 얼른 주고 보내! 오늘 우리 부모님이 내가 당신 데리고 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이 서준 씨 보고 싶대.”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한서준은 정신을 차렸다.
한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는 민씨 저택에 방문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말에도 하연의 얼굴은 서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
서준은 답답하고 복잡했다.
“저기 있어.”
하연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신분증이 정수기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마치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네.”
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분증을 주워들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대표실을 떠났다.
그 뒤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저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가십거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더군다나 회사에선 하연이 서준을 꼬셔서 그에게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녀는 법적으로 서준의 부인이었지만, 내연녀로 치부됐다.
하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최 비서님, 밖에 비 와요. 추우시면 제 겉옷 드릴게요.”
우산을 가져다준 사람은 다름아닌 구동후였다.
‘매정한 HT그룹에도 따뜻한 사람이 있긴 하구나.’
겉옷을 벗으려는 동후를 본 하연은 그를 말리며 씁쓸함을 목에 삼켰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구 실장님. 이제 만날 일도 없겠네요.”
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본 동후는 입을 움직였지만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럴 때는 폭풍우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앉아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던 하연은 몇 년 동안 살았던 도시가 눈에 들어와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지친 그녀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말했다.
“오빠…….”
그녀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8시간 후, 전용기가 B시 공항에 착륙했다.
하연은 키가 크고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의 품에 안겼다.
뒤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의 캐리어를 끌고 두 사람을 전용기에 태웠다.
……
늦은 밤,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천천히 한씨 고택으로 들어섰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서준은 고개를 들어 무성한 관목 아래 고층 저택을 바라봤다.
평소 늘 불이 켜져 있던 침실도 어둡기만 했다.
‘진짜 갔구나.’
혜경은 서늘한 서준의 기운을 느꼈고, 식사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한 말 때문에 화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서준 씨, 밥 먹을 때 우리 언니랑 서준 씨 사이에 일어난 일로 기분이 상했다는 거 알아. 결혼은 서두르지 않아도 돼, 우리 아빠는 신경 쓰지 마. 우리 아빠는 내가 혼전임신이라 재촉하는 것뿐이야…….”
혜경의 말에 서준은 생각을 뒤로 미뤄두고, 그녀가 잡은 자신의 소매 끝을 보며 말했다.
“구겨졌네.”
혜경은 그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
그 후 서준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고, 혜경은 쓸쓸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늘 대표실에서 자기 다리 위에 앉혔으면서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딴 사람이 된 거야?’
하지만 그녀는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서준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제11화 참가 자격이 박탈당하다
고택에서 한참을 기다린 가정부는 돌아온 한서준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서준의 뒤에 있는 민혜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혜경 아가씨, 방은 준비해 뒀습니다. 이쪽 복도를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
서준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던 혜경은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서준 씨,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고택으로 들어오는 걸 동의한 서준은 결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격이었다.
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혜경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남아있던 하연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그는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해라고 지시했었다.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먼저 자러 가.”
서준은 무관심한 어투로 혜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예상대로 혜경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추궁을 해 왔고, 서준의 지시를 받은 배현숙이 그녀를 막았다.
“혜경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
고택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차갑기 짝이 없는 서준의 얼굴이 가려졌다.
혜경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눌렀다.
‘귀국한 후로 서준 씨의 행동이 너무 달라졌어.’
가깝고도 먼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서재로 돌아온 서준은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은 뒤 손에 든 문서를 훑어봤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하연이 서재에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고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
때로는 서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소파에서, 서준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프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그녀의 흔적에 서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구 실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준은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대표님, 방금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HT그룹이 기부금액 적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서준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원래 이 모든 것은 하연이 담당했지만 그녀가 떠난 이상 모든 건 동후의 몫이 되었다.
“기부금액 적다고? 박람회 참가 자격은 각 그룹이 적십자사에 기부한 금액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거 아니야? HT그룹은 작년에 이미 600억 원을 기부했어, 근데 적다고?”
대표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동후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려고 최 비서님께 연락드렸지만,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고…….]
“…….”
동후는 다음 말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곧 서재는 정적에 휩싸였고 서준은 인상을 지으며 오늘 대표실에서 유니폼을 벗던 하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휘몰아쳤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하연은 시골에서 태어나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노력 끝에 옷가게를 열었지만 서준과 결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렇게 하연은 한씨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주는 용돈을 제외하고는 추가 수입이 없었다.
‘돈도 없는 여자가 어디로 갔을까?’
“우선 시골로 가 봐.”
그는 하연이 알려준 고향 주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전화해. 총책임자랑 얘기를 해 봐야 겠어.”
전화를 끊은 서준은 휴대폰을 집어 던졌고,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제12화 D국의 다섯 오빠들
유럽풍 건물의 호화로운 스위트룸, 최하연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방 구조나 가구들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다름없었다.
하연의 머리맡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는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
코 끝이 시큰거렸다.
B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우였다.
“할아버지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심정지가 오셨어,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셔.”
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풍기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났다.
그는 B시로 하연을 데리러 온 오빠 최하민이었다.
하민은 현재 최씨 가문의 경영을 이끌고 있고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나 울먹였다.
“오빠, 많이 위중하신 거야……?”
“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넌 네 몸이나 챙겨.”
하민은 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았다.
“지금 네 꼴을 봐, 이게 사람 얼굴이야? 예전에 한 약속 잊었어?”
이 말을 들은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서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아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영원히 최씨 가문에 남아 가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하연은 최씨 가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4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사람을 찾아 놓은 거야?’
‘나씨 가문의 아들은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근데 오빠 난 이혼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
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
순간 하민은 표정을 풀더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겁주려고 한 말이었다.
“넌 최씨 집안 딸이야. 우리 가문은 자식을 팔면서까지 집안을 키우진 않아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치하실 때까지는 내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똑똑히 해.”
이 말의 의미는 D국에 있는 하민의 DS그룹에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하연의 가족들은 그녀가 상운대 글로벌비지니스학부에 들어갈 때부터 이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디자이너 브랜드 숍을 열고 서준에게 첫눈에 반할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오빠랑 할아버지가 많이 속상해하실 거야.’
“알겠어.”
그녀는 재혼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다고 말했다.
하민은 움푹 패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응’하고 대답했다.
‘우리 하연이만 보면 가슴이 아프네. 하지만, 이번 결혼이 하연이에게 교훈을 줬을 거야.’
“대표님.”
그때, 누군가가 방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하민의 비서였다.
“한서준 씨가 참가 자격 박탈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 대표님과 만나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하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오빠, 설마…….”
하민은 그녀를 데리고 온 후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한씨 가문을 공격했다.
이는 서준이 하연만 믿고 이번 박람회에 관심이 없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연만 믿고 있던 일이 이렇게 바뀔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이건 최씨 가문 딸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무언의 경고야. 이제 네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지?”
하민은 하연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비서와 함께 떠났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며칠 동안 하연이를 데리고 D국의 주요 산업단지를 돌고 수석 비서의 모든 업무를 숙지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넓은 침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수석 비서…….’
이 직급은 대표 다음으로 높은 직급이었다.
하연은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이번에도 오빠를 실망시키면 안 돼.’
“서프라이즈!”
하연이 DS그룹의 최고층 사무실로 들어온 지 이틀이 되던 날, 건들건들한 한 남자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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